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수아 다를랑 (문단 편집) == [[비시 정부]]에 들어가다 == [[파일:external/1.bp.blogspot.com/HU060018.jpg]] [[필리프 페탱|페탱]]과 함께. 1940년 프랑스의 항복과 더불어 출범한 [[나치 독일]]의 위성국인 [[비시 프랑스]]에 잔류해 해군 장관으로 취임했고, 그는 전쟁의 와중에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프랑스 해군 함정들이 [[크릭스마리네]]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다를랑 제독의 노력은 비시 프랑스를 크게 자극하지 않으려는 [[아돌프 히틀러]]의 의도와 맞아 떨어져, 프랑스는 자신이 보유한 함대를 일단 보전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후에 그 함대는 캐터펄트 작전과 툴롱에서 자침을 거치며 소멸했다. 후술되는 내용 참조.] 그러나,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는 비시 프랑스를 신뢰하지 못했고, 프랑스 본토가 아닌 해외 및 자국으로 피신한 프랑스 해군 함정 및 인원들에 대해 영국 해군과 함께 계속 독일에 맞서 싸우거나 함정의 무장을 해제하고 제3국에 보관할 것 중 하나를 택할것을 요구하였으며 그렇지 않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무력화시킬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였다. 다를랑 제독은 이를 우려해 영국에게 프랑스 해군은 철저히 중립을 지키고 히틀러의 의도에 이용당하지 않을 것임을 보증했으나, 그를 신뢰하지 않은 처칠은 영국 해군에게 해외의 프랑스 해군 함정들과 기지들을 연합군에 다시 합류하거나 무장을 해제시키는, 이른바 [[캐터펄트 작전]]을 지시, 1940년 7월 초에 수행되었다. 영국으로 피신하는 등의 이유로 해외에 배치된 프랑스 함대는 일부 작은 저항도 있었으나 순순히 함정들을 넘기고 귀국을 원하는 장병들은 귀국하고 일부가 [[자유 프랑스]]의 일원으로 남아서 대체로 문제가 없었으나 장술 제독이 지휘하는 메르 엘 케비르 항구에서 문제가 터졌고 결국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아 다수의 함정이 격침/손상되고 1천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일부는 용케 포위망을 뚫고 도주해 프랑스 본토나 [[알제리]] 등 비시 정부 통제하의 식민지로 도망쳤다. 영국의 이런 행위에 분노한 다를랑 제독은[* 캐터펄트 작전 때문에 수천 명의 프랑스인이 사망했다.] 이후 연합국을 적대국으로 여겼으며, 훗날 [[횃불 작전]]에서 연합군이 피를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41년 2월부터 1942년 4월에는 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지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